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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8년, 중세 유럽을 죽음으로 뒤덮은 흑사병의 근원지는 아시아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풍토병이라고 하는 흑사병이 어떻게 유럽까지 건너왔을까?



크림 반도 무역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카파'는 매우 번화한 도시였는데,


1343년에 문제가 생겼다, 바로 국교가 이슬람교인 몽골의 킵자크 칸국 교도들과 충돌이 벌어진것이다.



킵자크 칸국의 왕 자니 베크는 그것을 빌미로 카파를 공격한다.



이탈리아인들의 엄청난 방어능력에 발도 못디디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는데


킵자크 칸국은 43년과45년에 걸친 두 번의 공성은 실패하였지만, 1347년에 벌어진


전투에서는 카파를 함라시키고 마는데 이탈리아 병사들의 방어를 무력화 시킨 비밀병기는 바로


'생화학 병기, 인간 시체탄'이다.


당시 전투 중 킵자크 칸국 병사들이 이유 모를 전염병으로 죽어나갔는데,


그것을 보던 지휘관들이 투석기에 돌 대신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올려서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시체탄은 생각 이상의 효과를 보여주었는데,


전염병에 걸린 시체가 온 도시에 쏟아지자 도시 내부는 순식간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적의 공격과 내부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도시는 언제 함락되어도 이상하지 않아


이탈리아 상인들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를 이용하여 순식간에 본국으로 도망을 간다.



그렇게 유럽전역으로 흑사병을 수출하게 된다.


1348년 초 유럽으로 넘어간 흑사병은 순식간에 마르세유와 제노바 등 항구도시를 거쳐


단 몇개월 만에 유럽 전역을 뒤덮었고, 공기 전염인지, 접촉 전염인지, 음식물 때문인지 감염 경로조차


파악할 수 없었던 흑사병은 의사들도 손놓고 무력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흑사병이 돌던 당시 의사들의 복장으로 널리 알려진 모습이다.


감염되지 않기 위해 저렇게 마스크에 모자에 전신을 덮는 옷을 입었다고 한다.


감염 경로도, 치료법도 알 수 없는 이 병은 처음엔 화살로 찌르는 듯 따끔거리다가,


온몸에 고열이 올라 앓아 눞게 되는데, 그렇게 병이 깊어지면 환자의 피부가


괴사하면서 검게 물드는데, 문제는 환자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피부가 썩어가기 때문에


본인 피부가 썩는 냄새와 과정을 그대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흑사병은 병든지 몇 시간 만에 죽는사람들도 있었는데, 보통은 5일 정도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1349년 여름에는 흑사병으로 인해 프랑스에 매일 800명 이상의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피렌체의 시민들은 역병의 원인이 개와 고양이에게 있다고 생각해서


개와 고양이들을 수도 없이 학살하기도 했다.


런던 시민들은 흑사병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성문을


걸어 잠궜지만,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베네치아에선 입항하는 모든 선박들을 40일간 격리시키고


검역을 실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40일 이후에도 그 배에


흑사병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없으면 통과되는 식이었다.




검역을 뜻하는 Quarantine이 바로 이 40일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40일간의 격리 조치에도 불구하고 흑사병 앞에 베네치아 역시 인구 절반이 목숨을 잃는다.



이렇게 이유도 모르고 치료법도 알 수 없는 흑사병 앞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곧 온갖 괴상한 치료법이나


예방법들이 돌기 시작했는데, 환자에게서 나는 악취가 그 원인이라 생각하여 밖에 나설 때는 향수를 뿌리고


꽃다발을 들고 다니며 냄새를 맡거나 접촉을 피하기 위해 긴 옷과 장갑을 끼고


먹는 음식도 바꾸었으며 땀구멍이 열린다고 씻지도 않았다고 한다.


물론 1도 예방과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흑사병의 공포는 더욱 크고 깊어져갔고


사회의 도덕과 질서, 역사 자체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더 이상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수 많은 환자들이 타인들에 의해 불타 죽거나 맞아 죽었다.


흑사병을 신의 저주라 생각해 속죄를 부르짖는 이단 종파들도 수 없이 생겨났는데


이 때 이단 조파들의 유언비어에 의해 수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사실 흑사병으로 인한 피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보다 유럽이 훨씬 더 컸다.


중국에서는 유럽보다 더 많은 3300만명 정도가 사망해 송나라 때 인구 1억명을 넘겼던 중국의 인구는 


수백년이 지난 명나라 때가 되어서야 2억명을 넘길 수 있었고, 이집트의 경우 흑사병이 지나간 뒤의


인구가 무려 당시보다 1200년 전인 7세기 인구의 3분의 1도 못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흑사병의 피해가 이렇게 전 세계에서 일어났는데, 유독 유럽의 흑사병만 화제가 된 이유는


전염병이 돌고 난 뒤 유럽의 역사나 문화, 예술 등 전반적인 것들이 크게 뒤바뀐 것이 이유가 되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기 때문에 유럽에는 여러 유족으로 부터 상속을 받은 벼락 부자, 속칭 졸부들이 수도 없이


생겨났고, 인구 감소로 부족해진 노동력 때문에 농민들의 임금은 가파르게 상승했으며 수 많은 예술가와 학자 등이


목숨을 잃어 더 이상 예술적인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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