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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화통일이란 무엇일까?

IMP@CT 2017. 6. 2. 00:48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아니... 아이들만이라도 살려주세요...

ㅡ하지만 라오스는 ≪화근(禍根)을 남기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맨 앞에 무릎꿇은 채, 두 손 모으고 절규하는 표정으로 "살려달라" 외치는 자의 표정을 보라. 이 땅이 적화된 후 우리가 겪게 될 모습니다.


'몽'족은, 북베트남과 인접한 라오스 산악지대에 살던 소수민족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 CIA를 도와 비밀작전 및 미군 포로 구출 작전을 벌였다.


1973년 미국이 철수한 후 버려졌고, 1975년 라오스가 공산화 된 후 수천명이 보복·살해되고, 재교육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4만여명이 해외로 탈출 망명했고, 5천명 정도가 라오스 밀림 속에서 수시로 거쳐를 옮기면서 숨어지내고 있다.


미국과 태국에 정착했던 몽족들은 라오스정부 전복 활동으로 구속되고, 태국에서는 라오스로 강제 추방을 당했다.


자유를 지키지 못하면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다.

힘이 없어도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다.


삶을 구걸할 것인가, 종북좌빨들을 죽여서 우리가 살 것인가? 선택의 날이 왔다

 

(적화통일 당한 베트남 시민들의 살려달라는 애원)





적화통일의 사전적 의미란?



분단국가에서 적국의 이념으로 하고 있는 측의 주도로 분단의 상대봥 정부를 전부 흡수하여 '공산'통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한반도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한국전쟁을 통해 실질적으로 무력 공산통일이 진행 되었던 적이 있는데, 누구나 다들 잘 알고 있는 6.25 기습남침이다.






실제로  겨우 6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전쟁의 역사의 사진 그대로 남아있다.

 

6.25 때 실질적인 공산통일이라는건 무력을 통해 상대 정부의 전복후 통일을 목표로 남침 하여 대한민국을 함락시키고

 

통일 하려는 목적으로 사전 준비, 주위의 소련,중화인민공화국 의 원조 등을 받고 내려온 무력 통일의 시발점인데,

 

물론 연합국측의 도움 미국등의 희생으로 우리나라는 함락 되지않고 살아남았다.

 

6.25는 우리나라에 시도된 최초의 적화통일의 실패의 사례 이기에 정확하지 않을 수도있는데,


그렇다면 다른나라는 어떨까? 마침 다른나라중에 적화통일이 된 나라가있는데,  바로 베트남이다.

 

다음은 베트남에 대해서 알아보자

 

실제로 일어난 적화통일을 알아보자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한 월맹과 월남의 분단.


우리나라와 비슷한 북 공산정권 남 자유정권

 

이런 와중에 북쪽 월맹이 월남을 공격하여 월남전 발생

 

허나 미국의 원조때문에 월맹은 매우 힘든 상황에 쳐하게 된다.



월남은 미국을 중심으로 북쪽 공격을 시작했고 사실상 통일 직전까지 가게 되는데,


미국은 막대한 재정을 통해서 월맹을 압박했다.


월맹은 단기적인 전쟁이 불가능하다 판단 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한다.

 

1. 평화를 언급하고 민족성을 내새워 미군을 내쫓는다.


2. 월남 정부에 민중봉기를 이용하여 월맹 추종정권을 세운다.


3. 다양한 루트를 통해 월맹에 대한 적대감을 없앤다.


4. 폭력과 비폭력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일을 강조한다.


5. 월남 정부가 자연스럽게 월맹에 종속되게끔 한다. 

 

 

가장 먼저 실시한건 미군의 철수를 위해 여론 형성이 주요 목표였고


평화 협상을 이야기하고, 공동 평화 제창을 앞세워 외부의 군사력을 철수시키자고 선동시킨다.


결국 1968.5.10 월맹은 비밀리에 협상을 시작하게 되고


미국내에서도 반전 시위가 벌어지고 여론이 형성 되면서 철수 결정이 되버린다.


동시에 소름끼치게도 월맹과 월남 내 간첩의 협의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1. 외세배격, 오직 우리 민족끼리

2. 월맹에 대한 공격은 동족살상이므로 금지

3. 미군 철수

4. 남북평화회담 개최


맹의 이러한 평화협정의 목적은 위와 같다.




신기하게도 월남에서 이 평화협정을 주장한 것은 대표적으로

 

월남의 변호사인 쭝딘쥬라는 사람이다.


쭝딘쥬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인권과 동족을 강조하며 선동을 했다.


외부세럭이 아닌 우리 민족 끼리 평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여론전을 펼쳤고


이 사람의 정체는 정말 평화를 목적으로 말한 사람이 아니였다.


후에 밝혀진 이 사람은 사실 월맹 공산당의 간첩이였던 것이다.


쭝딘쥬를 포함하여 월남에 잠식해있던 많은 좌익 간첩들의 선동을 통해 결국 미군은 철수를 한다.


월맹도 변호사 출신이 가장 간첩으로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좋다는 것을 깨닫고 


변호사 계층을 간첩으로 적극 유도하기 시작했고


사실 월맹은 패망 직전이었기 때문에 평화협정 없이 조금만 더 버텼으면 통일이 완성 되었을 곳이였으나


엄청난 여론 선동전에 밀리면서 미국은 결국 철수를 하고만다.



언론, 교육, 종교, 군대


월맹은 언론과 교육계, 종교계 등을 이용하여 월남 국민들을 선동해 나갔는데,


월맹은 직접 전투가 아닌 평화를 주장하면서,


월남 내부에 간첩들을 이용하여 반정부 투쟁을 시작한다.


시위를 선동하는 간첩들은 보통 기자, 변호사 등 사회 고위 계층이라는 사실..



더 놀라운 사실은 당시 '법무장관'인 쫑뉴탄의 증언이다.


월남 정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은 단 하루만에 월맹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월맹은 월남의 주요 조직에서 활동한다.

 


 





월맹은 지속적으로 월남의 사회 각계 고위층을 이용하여 선동을 이어나갔는데,


또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보기관을 대대적으로 숙청해버리면서 월남의 대북 정보라인이 사라지게 되버린다.


그리고 언론도 함께 장악 하고 내부의 기자들이 특정 서클 형태의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에 가담하지 않으면 퇴출이 되는 식으로 바꿔버린다.


물론 그 서클은 월맹 간첩 조직이었고, 그렇게 월남의 언론을 장악하여 월남 정부에 대한 비난과 허위사실을 적극적으로 유포 해서 정권에 대한 반감을 크게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우파 보수 자유주의자들의 대북 강경책에 대해 "전쟁광"으로 매도하는 언론 보도가 엄청난 수준으로 나왔으며,


그런 언론의 보도 속에 자란 세대들, 또한 역시나 간첩들이 장악한 교육계, 언론 보도와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월맹과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완전이 사라져버렸다.

놀랍게도 월남은 당시 인구 2천만에 공산당원은 불과 9500명 인민혁명 단원은 고작 4만 명에 그쳤는데, 0.25%도 안되는 간첩 세력으로 자유 월남을 몰락시킨 것이다.

이후 월남은 계속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다가 결국, 1974년 1월 월맹의 공격을 다시 받고 마침내 1975년 4월 30일 패망해버린다.


전쟁이 아닌 간첩을 통한 선동으로 국가를 흔들어 놓고 쉽게 통일하는 전략, 이게 바로 베트남의 공산화 전략이었는데, 쭝딘쥬를 포함한 월남에서 선동을 이끌어 왔던 월맹 간첩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하고 가장 먼저 고문당하고 처형 당했다.

경제 또한 통제경제 체재로 변경하여 500:1의 화폐개혁으로 개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며,

1,500개의 기업은 국유화되었고, 토지, 농기계 등은 몰수되어 공동생산, 배급제로 변경이 되었다.

이로 인해 세계 2~3위의 쌀 생산국에서, 매년 100만 톤 이상의 쌀을 수입하는 국가로 전락하였으며, 공산화 10년 동안 경제는 무너지고 4백만 명의 실업자가 양산되었고, 많은 국민들이 공산화를 피해 육로로 해로로 베트남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보트피플) 그 과정에서 수많은 국민이 학살당했다.


사실상 우리나라도 안전한 지대는 아니라 생각한다. 우선 북한 최고위층이라고 하는 고 황장엽 선생이 말했다.
 
고정간첩이 실제로 있다고 그 수가 적지만 권력 핵심부층에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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